④ 대충, 빨리, 잘 — 일을 끝내는 순서: 초안, 다음 행동, 최종 검토를 상징하는 스틱맨 일러스트
일하는법/생산성

④ 대충, 빨리, 잘 — 일을 끝내는 순서

기획안을 써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빈 문서를 열면 자료부터 더 찾고 싶어집니다. 제목을 정한 뒤에는 첫 문장을 고치고, 문장을 고친 뒤에는 표와 디자인이 신경 쓰입니다. 하루가 지나도 기획안은 시작한 모양을 갖추지 못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자료나 더 높은 기준이 아닙니다. 전체를 대략 채우고, 다음 행동 하나를 정하고, 마지막에 고칠 부분을 좁히는 순서입니다. 이 글은 그 순서를 ‘대충, 빨리, 잘’로 정리합니다.

처음부터 잘하려 하면 순서가 거꾸로 됩니다

완벽주의자는 보통 ‘잘, 빨리, 대충’의 순서로 일합니다. 처음부터 좋은 문장과 완성된 디자인을 만들려 합니다. 시간이 부족해지면 핵심을 빼고 대충 마무리합니다. 정작 가장 공들인 부분은 초안의 작은 문장이나 표 하나일 때가 많습니다.

《WORK: 오늘부터 실패하지 않게 일하는 법》의 원고에는 이 순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완벽주의자들은 일할 때 ‘잘, 빨리, 대충’의 순서로 진행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는 시간을 적게 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시간을 써야 할 곳이 뒤바뀌는 데 있습니다. 전체 내용이 없는 상태에서 문장과 디자인을 먼저 고치면, 중요한 판단이 빠졌는지 확인할 기회도 늦어집니다.

그래서 책에서는 반대 순서를 제안합니다.

“그들은 ‘대충, 빨리, 잘’ 순서로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우선 ‘대충’ 시작해서 작업을 신속하게 진행합니다.”

여기서 대충은 품질을 낮추자는 말이 아닙니다. 품질을 높이는 시점을 뒤로 미루자는 뜻입니다. 먼저 전체를 볼 수 있는 모양을 만들고, 다음 행동을 이어가며, 마지막에 필요한 부분을 다듬는 순서입니다.

이 순서가 필요한 이유는 초안이 있어야 고칠 대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의 기획안은 논리도 문장도 검토할 수 없습니다. 한 장짜리 개요일지라도 화면에 놓여야 빠진 내용과 불필요한 내용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대충은 결과물의 첫 모양을 만드는 일입니다

여기서 대충은 빈칸을 무책임하게 남기는 일이 아닙니다. 이번 결과물에 필요한 뼈대를 먼저 만드는 일입니다. 제안서라면 문제, 제안 방향, 일정, 비용이라는 제목을 먼저 적습니다. 블로그 글이라면 제목, 도입, 소제목, 결론의 자리를 먼저 잡습니다.

처음부터 문장을 매끈하게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목 아래에 ‘고객이 지금 겪는 문제 3개’, ‘이 제안으로 달라지는 일’, ‘결정이 필요한 항목’처럼 메모를 놓으면 됩니다. 그 메모는 최종 문장이 아니지만, 다음에 채울 자리를 알려줍니다.

대충 만든 초안은 일을 줄이는 장치가 아닙니다. 일이 어디에서 비어 있는지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전체가 보이면 문장 하나를 더 고칠지, 빠진 판단 하나를 넣을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빨리는 다음 행동을 물리적인 일로 바꾸는 것입니다

대충의 다음은 빨리입니다. 이때 빨리는 서두르거나 오래 일하는 뜻이 아닙니다. 멈춰 있는 작업을 손으로 할 수 있는 다음 행동 하나로 바꾸는 일입니다.

‘다음 행동’이라는 관점은 데이비드 앨런의 짧은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상의 방법론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큰 일을 그대로 붙들지 않고, 지금 시작할 수 있는 한 가지 행동으로 바꾸는 기준입니다.

‘제안서 작성’은 할 일처럼 보이지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반면 ‘지난 회의록에서 고객 요구 3개를 제안서 첫 장에 적는다’는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음 행동은 동사로 적어야 합니다. ‘강의 준비’ 대신 ‘강의안에 들어갈 사례 2개를 고른다’, ‘블로그 글쓰기’ 대신 ‘도입 장면 5문장을 쓴다’처럼 적습니다. 일의 크기가 줄어들면 의지가 갑자기 커지는 것이 아니라, 망설일 이유가 줄어듭니다.

잘은 마지막에 검토하는 일입니다

초안을 만들고 다음 행동을 이어갔다면 그때 잘할 차례가 옵니다. 이 단계에서는 모든 부분을 같은 수준으로 다듬지 않습니다. ③에서 정한 완료 기준을 다시 봅니다. 이 결과물이 쓰일 장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확인합니다.

제안서라면 숫자와 일정, 선택지가 맞는지 봅니다. 블로그 글이라면 제목이 글의 판단을 담고 있는지, 도입이 독자가 처한 장면과 닿는지, 근거가 빠지지 않았는지 봅니다. 문장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그다음입니다.

그래서 ‘잘’은 가장 오래 붙드는 단계가 아니라 가장 좁게 검토하는 단계입니다. 고칠 기준이 없으면 마지막에도 처음처럼 모든 부분이 중요해집니다. 기준이 있으면 이번에 고칠 것과 다음 글, 다음 제안서로 넘길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을 세 줄로 시작합니다

다음 작업을 시작할 때는 아래 세 줄만 적어도 됩니다.

대충: 오늘 만들 결과물의 제목과 소제목을 먼저 채운다.
빨리: 지금 20분 안에 끝낼 다음 행동 하나를 적는다.
잘: 보내기 전 반드시 확인할 항목 세 개를 정한다.

예를 들어 다음 주 강의 제안서를 써야 한다면 ‘대충’은 슬라이드 제목 10개를 적는 일입니다. ‘빨리’는 대상 기관의 요청 사항을 첫 슬라이드에 옮기는 일입니다. ‘잘’은 강의 시간, 대상, 산출물이 제안서 전체에서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세 줄을 적었다고 작업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막연한 큰 일을 지금 할 수 있는 크기로 바꿉니다. 처음부터 잘하려는 마음이 다시 올라올 때도, 지금이 어느 단계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을 끝내는 사람은 매번 더 좋은 출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략의 초안을 먼저 만들고, 손에 잡히는 다음 행동을 정한 뒤, 필요한 곳에만 검토를 씁니다. 일을 잘하는 순서는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시간을 먼저 둘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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