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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아버지 인터뷰' 진행할 때 최불암씨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 때 들었던 이야기 중에 흥미로웠던 것이 '아버지 자리'라는 거다.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어느듯 우리 문화에는 그런것이 사라져가듯이 아버지라는 존재감도 줄어드는 것 아닌가 생각이 된다. 권위의식을 찾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한국적인 무언가가 없어져가고 있는것 아닌가 싶어서 하는말이다. (당시 진행했던 최불암씨 인터뷰 일부내용을 참조)


('아버지의 자리' 시대가 변해도 그 자리에 있어야 - 국민 아버지 최불암)
 예전에는 '아버지의 자리' 라는 게 있었죠, 우리 온돌문화로 말하자면, ‘아랫목은 아버지의 자리다’라는 게 있었거든요 .근데, 다른 건 몰라고 그것만은 지켰어요.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는 것, 우리 어머니도 그 자리는 탐내지 않으셨고, 거기는 아버지의 자리이니까 (극 중)우리 처도 몸살이 나서 뜨거운 데에 몸을 지지고 싶어도 가급적 안 가요. 내가 거기에 앉는 거지. 동네에서 저보다 더 어른이 와도 '동네 어르신 추우신데 여기 앉으시죠' 그래도 사양해. 그건 아버지의 자리다 그런 거죠.

중략..

근데, 아버지라는 개념이 사실은 잘 표현이 안 되죠. 아버지가 웃지 않는 아버지, 근엄하고 권위적 아버지, 이거에서 탈바꿈해야 될 것 같아요. 진짜 웃기고, 같이 놀 수 있는 식으로 바뀌어야 할 겁니다. 그런다고 아버지의 권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유머러스하고 잘 웃어주는 아버지, 아이들의 형편을 잘 이해해주는 아버지, 이런 아버지 쪽으로 가야 된다고 봐요. 굳이 표현하자면 ‘멋진 아버지’라고나 할까요.
 지금의 아버지는 너무 연약하게 해석하지 않았느냐, 좀 모질게, 강건하게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요. 지금은 너무 연약하게 보이는 것 같더군요.



(참고로 3개월 기간동안 총 10분의 아버지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Q. 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날 때는 언제인지?


(내 몸속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 - 구본형 소장 인터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있지만,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 후 아버지가 많이 아프셨어요. 한달 정도 누워있었는데, 당시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돌봤기 때문에 살아나셨죠.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발을 하고, 당시 여름이었는데, 모시를 입었었죠. 그 모시옷을 입고 어디를 가셨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저보고 따라가라 했어요.(당시 중학교 1학년 때, 형제는 2남 2녀 중에 막내)
 아버지 하고 혜화동거리 어딘가를, 아마 저희 이모 집을 간 거 같아요. 그때 그 장면이 왠지 기억이 뚜렷해요. 아주 생생하게 말이죠. 뭔가 약해진 아버지를 본거 같고, 생각보다 잘 걸으셨고, 지금의 제 나이쯤 되었을 텐데, 그때 생각이 참 많이 나요. 아버지의 진실한 뒷모습을 봤던 거라고 할 수 있죠.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는데, 한번도 성공한 이 없어요.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누나들은 할머니가 전라도 광주에서 키웠고, 당시 6.25가 나서 서울에 살다가 피난으로 해남까지 내려갔어요. 그러다가 올라오는 과정에서 할머니는 광주에서 정착을 했고, 막내라서 아버지를 따라 서울 등을 돌아다니게 되었죠. 집안 식구들도 다 흩어지고, 나만 막내라 아버지를 쫓아다닌 거죠.
부산에서도 살고, 서울에서도 살다보니 초등학교를 4번 다녔어요. 아버지는 지금 안계시죠. 20년 전에(87년도에) 돌아가셨어요.




(부모를 '그남자, 그여자'로 볼 때 정서적으로 독립한다 - 김어준 인터뷰)
 저희 부모님들이 대단한 교육철학이 있다고 보지는 않으나. 예를 들어 이런 분이셨어요. 맛있는 것을 같이 먹으면, 보통 부모님들이 맛있는 것을 밥에 얹어 주기도 하는데, 저희 부모님은 당신들이 먼저 다 드셨어요. 왜냐면, 너희들은 먹을 날이 많지 않느냐 그런 거죠. 기본적으로 그러셨고,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저는 그게 당연한 것인지 알았죠. 예를 들어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면 부모님들이 대게 요금 용지를 보여주면서 혼을 내죠. 근데 전 혼나 본적이 없어요. 다만, 그걸 내가 내야 했죠. (웃음)

 제가 일찍 독립해서 따로 나와 살았는데, 어느 날 집에 가서 아버님한테 ‘결혼해야 되겠다' 했더니, 첫 마디가 '누구랑?'이 아니라 한마디로 '언제?' 였죠. '누구랑'은 제가 결정하는 거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하시는 거죠.

 어머님은 도시락도 제대로 안 싸주셨는데, 저도 사실 공부 하는게 유세인가 했어요. 어머님은 유치원을 하셨는데, 당신도 바쁘고 나도 바쁜데, 내가 하는 일이 특별히 더 대단해, 부모가 피곤하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 주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게, 자연스럽지 않다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어요.

 이게 자랑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부모가 저를 이렇게 키우다 보니 저도 그냥 내가 내 맘대로 알아서 한다, 결론적으로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한다 하고, 한번도 말로 “너 인생은 너의 것이야”라고 말씀 하시지 않았으나, 그렇게 자라버린 거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에 중요한 사건 하나는 - 어느 날 고등학교 다니던 중에 시험치고 일찍 집에 왔어요. 고등학생 남자와 아버지하고 할 말 없잖아요. 근데, 그날따라 밥상을 차리는데, 보통 남자들은 반찬을 냉장고에서 껴내서 차려주곤 하잖아요. 근데 이 양반이 갑자기 평소에 안 하던 삼겹살을 굽더군요. 한번도 그런 것을 본적이 없는데, 고기를 특별히 좋아하시지도 않는 분이.... ‘이 양반이 왜 삼겹살을 굽나’라고 혼자 생각했으나, 뭐 ‘먹고 싶나’ 보다 생각하고, 밥을 마주 앉아서 먹었죠. 근데, 밥을 다 먹을 때 쯤 되어서 갑자기 숟가락에 고기를 탁 얹어주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한번도 그래 본적이 없던 분이.... 제가 그 짧은 순간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평소 아들에게 이렇게 해보고 싶었구나 싶었죠. 벼르다가 밥을 다 먹기 직전에 (웃음) 딱 한번 해 본거예요. 눈물이 핑 돌았는데, 그렇다고 서로 뭐 아버지하고 울고 그럴 수 없잖아요. 서로 모른척하고 밥 다 먹고 제방으로 들어왔는데, 밖을 내다보니까 아버님이 휘파람을 불면서 설거지를 하고 있어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40대 초반의 한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5~6살 이후 기억하는 한, 지지고 볶으며 애들을 키우고, 와이프(엄마)하고, 집 마련하고, 먹고 살며, 그런 굴곡들을 옆에서 봤잖아요. 그런 40대 남자가 자식 2명에 와이프하고 사는 모습 중에, 뭔가 즐거운 일이 있어서 휘파람 부는 걸로 보였어요. 아버지가 아니라 처음으로.

 그러니까 당연히 동시에 엄마도, 엄마가 아니라 이런 남자하고 사는 여자로 처음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론 한번도 요구하거나 야속해 하거나 기대본 적이 없었죠. 그때는 몰랐는데 커서 보니까 그때가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한 순간이었어요.

 근데, 이런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남들한테는 못했어요. 왜냐하면 '난 아버지가 남자로 보여, 엄마는 여자로 보이고' 이렇게 친구들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그남자, 그여자'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데, 그런 걸 친구들이 못 받아들이더군요. 내가 그 분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20대에는 그래서 이야기를 멈췄죠. 내가 싸가지 없는 놈인가 보다 생각하고.... 나이를 더 먹고 30대 지나가다 보니 그때가 정서적으로 독립한 순간이었어요.
 저는 부모가 친구 같고, 귀엽고,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이 드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걸 못 받아들이더라구요. 왜 그러냐면 처음부터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만 갔기 때문에 그래요. 명절이라서 차 밀리면서도 꼭 내려가야 한다는 식의 효를 저는 별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사회적 기대를 따르는 그런 효도 말이지요. 평소에 잘 하지요. 저는 다른 효자들보다 더 건강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식은 결국 떠나 보내야 하는 존재다 - 강학중 소장 인터뷰)
아버님에 대한 원망은 거의 없어요. 성장과정에서 부모님에게 대들거나 반항한 적이 거의 없어요. 형님들한테도, 선생님한테도 성장과정은 그랬어요.
아버님하면 떠오르는 것이 제가 6살 때인가, 아침에 눈을 딱 뜨면 아버님 수염을 만지면서 구구단을 외웠던 기억이 나요. 추석 때쯤 할아버지 성묘하러가면서 버스타고 갔는데, 버스 기다리다가 구멍가게에서 박하사탕 사주셨던 거 기억이 납니다.
 좋을 때 많이 생각나고요. 제가 술을 마실 수 있으니까 어머님이 늘 술을 많이 담가 놓으셨어요. 포도주, 딸기주 그런 거요. 이제는 내가 술을 마실 수 있으니까, 아버님을 모시고 나가서 약주를 대접해 드릴 수 있을 텐데 그때 생각이 참 많이 나요. 그리고 결혼 할 때하고, 막내며느리 보면 얼마나 기뻤을까, 막내아들(본인) 놈 고등학교 졸업할 때 보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중학교 2~3학년 때인가 일기책에도 쓴 기억이 있는데, 어머님하고, 아버님하고 크게 싸우신 적이 있어요. 그러시고 어머님은 이모님 집으로 간다고 가셨어요. 아버님이 혼자 앉아 계시는데 너무 안돼 보이셔서 어린 마음에, 불쌍하다는 말을 아버님께 쓰면 안 되지만, 무지 불쌍해 보이셨어요. 그래서 옆에 구멍가게에 가서 호빵을 사다가 드렸던 적이 있어요. 나 혼자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거울을 보면 그 곳에 아버지가 서 계신다 - 손병목 소장 인터뷰 )
좀 뚱딴지같은 답변인데요. 거울 볼 때예요 거울보고 깜짝깜짝 놀래요 아버지가 거울에 있으니까요. 진짜 깜짝 놀래요. 예전에는 보고 싶다 말을 못했는데, 남자들은 사실은 술 마실때 아니면 웬만하면 보고 싶다는 건 없어요. 여자들처럼 다정다감하지 않아서 웬만해선 안 보고 싶은데 군대가서 휴가 나와도 집에 안가고 애인이나 만나고 싶지 다 그런데, 커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집에 내려가는 것보다 집에서 처자식이랑 같이 있는 것을 원하는데 거울 볼 때 마다 깜빡깜빡 아버지를 보게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점점 더 많아지는 거예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만 하려 해도 짠해집니다.(말을 끊고 잠시 숙연해졌다)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좋게 이야기하면 아버지 DNA 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 유전자로 일생을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너무 고마운 거구요, 틀림없는 거잖아요, 사실 그게 다 일수도 있구요. 그 외에는 너무 책임감이 없으셨다는 것. 저는 철공소집 아들로 태어났어요. 아버님은 산소 용접이라는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머니를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켰으니까요. 아버지하면 딱 떠오르는 것은 착하신 분, 한 없이 착하셔서 여기저기 많이 당하신 분이었죠.
이런 일화가 하나 있어요. 79년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80년도에 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79년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가 하루는 먹는 은행을 하나씩 까서 꿀에 담그시더라구요. 전 그걸 보고서 당신 건강은 끔직히도 챙기시는구나 생각했는데, 근데 그게 저를 위한 것이었어요. 제가 기관지가 좋지 않으니까 저를 위해서 그걸 했던 거예요. 나중에 그걸 알고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몸이 약한 저를 위해서 자라피를 구해다가 먹이셨는데, 자라피를 먹이면 추위를 안탄다고 여러 번 말씀 하셨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게 잠재의식 속에 남아서 겨울에 추워도 추운 티를 낼 수가 없어요. 추워도 참는 거지요. 아버지가 실망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는 얼굴이 아버지와 똑 같아요. 어떨 때 거울을 보면 진짜 아버지가 거울 안에 서 계셔서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지금은 모든 걸 다 잊었고 보고 싶죠. 같이 사셨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 3년을 고통으로 지내다 - 윤지강 저자 인터뷰)
아버지는 정말 소처럼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분이었는데, 가시기 한 달 전까지도 농사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평생 아버지가 농사지은 쌀로 지은 밥을 먹었습니다. 새벽에 연탄불 갈고, 물을 끓이는 일이 모두 아버지의 몫이었어요. 참 충실하고 착한 분이었는데도 제가 아버지를 경원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지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만족스럽지 못했고, 평생 그 한풀이를 하셨지요.

 제 머릿속에 '아버지가 무식하다'라고 입력된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지요. 저는 매우 예민하고 감성적인 소녀였기 때문에 자라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로 매우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도 사실 아버지를 사랑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지요. 워낙 자존심이 강해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울증을 앓지 않으셨나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미워했던 아버지의 존재가 자신의 삶에서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깨달았지만 자존심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셨던 것이죠. 아버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생각해요. 만약 엄마가 좀더 인내하고 자신의 한을 내면에서만 삭일 줄 아는 여성이었다면 자녀들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희 집 오빠와 남동생은 마음이 너무 좋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오히려 자신들은 무서운 아버지가 되었죠. 제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한 사람이 오빠였는데, 제 조카들도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모두 방으로 들어가 숨었죠.
 아버지도 사실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위상을 자녀들에게 만들어 주는 것은 어머니의 지혜로움이 매우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혜민아빠 트위터 - http://twitter.com/hong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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