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란 주제를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인터뷰는 아버지를 뒤돌아봄과 동시에, 아버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시간을 할애한다. 그 인터뷰의 두  번째 주인공인 개그맨 이홍렬씨를 만났다.

얼마 전 한 행사장에서 우연찮게 이홍렬씨 옆자리에 앉게 된 인연으로 인터뷰를 청하게 됐고, 이홍렬씨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25일 저녁 이홍렬씨가 운영하는 크라제 햄버거 홍대점에서 만났다.

의외의 곳에서 전문가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 되기는 쉬워도 아버지 노릇하기는 어렵다>, <아들아, 아빠가 잠시 잊고 있었단다-번역서> 두권의 책을 출간했던 경험 있는 아버지였다.


정식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담화,

“내 옛날에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요. 아버지가 생활력이 없어 가지고, 어머니가 삯바느질 해 가며 저를 키웠거든요. 근데, 나이 먹고 자식 낳고 아버지가 되다보니 아버지가 돈을 벌기 싫어 못 번 것이 아니라,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무진 애썼는데 잘 안 된 거지, 아버지가 저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DNA 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인생을 잘 사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 면에서는 아버지를 참 많이 생각하게 되요.”

두 아들 교육이 각별하다고 한다. 무조건 뒷바라지하지 않는다, '덜 주고 강하게 키운다’ 라고 말하면서 아이들과 오래 전부터 한 세 가지 약속이 있다고 했다.
"첫째 용돈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준다. 둘째 공부는 하고 싶을 때까지 시켜주겠다. 셋째 유산은 한 푼도 안 준다"
“아이들이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예요. 그렇게 하다 보면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을 기회를 갖게 되죠. 가난했던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가르쳤던 방법이기도 하고요.”




Q. ‘아버지가 되었구나’를 확실하게 느낀 때는 몇 살 때인가요?

40 넘어서 생각나게 되더군요. 사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전 좀 일찍 많이 생각했었어요. 왜냐면 아버지가 워낙 일찍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51세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59세에 돌아가셨어요. 60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죠. 당시 제 나이 스물여섯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 다음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너무 애틋했기 때문인지, 어머니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은 반면에, 아버지는 좀 무책임 한 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죠.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너는 아버지처럼 그러지 말고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자식을 낳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시켜야 부모의 도리며, 가정을 지키고 이끌어가는 책임감을 가져야 된다.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한 마디로 신용과 책임감이라는 말로 압축이 되요.
신용과 책임감은 가훈이기도 해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어머니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많이 하셨는데도, 그러면서도 때 제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하면 야단을 치셨죠. 너는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엄마고 아버지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지만 너에게는 ‘잘해도 아버지, 못나도 아버지 아니냐?’ 너는 그러면 안 된다라고  늘 말씀하셨죠.
나이 서른 넘고 정신없이 살면서 서른넷에 장가가고, 서른다섯에 아빠 되고, 마흔 넘어가니까 그때 정말 아버지가 되어가는 거 같더군요.
그 나이가 되자 비로소 ‘아버지가 생활력이 없어서 그랬겠어, 책임감이 없어서 그랬겠어, 이 사업도 해보고, 저 사업도 해보면서, 그렇게 순진하면 안 되는 건데, 그래도 한번 사업도 잘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을 건데, 근데 모두 잘 안 되다 보니 무능력한 아버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어쩌면 그런 것이 반면교사로 작용해서 저는 무조건 놀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늘 해요. 지금 나이에 제일 두려운 것이 일이 없을까 봐 두려워요.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왔잖아요. 앞으로 더해서 인기를 얻기 보다는 이 일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마이크 잡는 일이 저의 천직이잖아요. 그냥 마이크 잡는 일을 평생 끊이지 않고 했으면 합니다.



Q. 아버지가 연예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반대고 뭐고 없었어요. 왜냐면 그것도 있는 집에서나 하는 거지 워낙 힘들고 어려웠던 어린시절이라 반대는 없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달이(매달) 돈을 안 갖다 주시니까 너는 기술을 배워서 기술자가 되어라, 그러면 월급이라는 것을 받을 것이다. 어머니는 일생 동안 ‘다달이’라는 것을 원하시다 돌아가셨어요. 어찌 보면 다달이 월급을 받는 것이 가장 쉬운 건데, 그걸 못 받으시고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말씀이 ‘네가 만약 연예인이 되고자 하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내가 뒷받침을 못해주니 그게 정말 답답하지 않느냐. 첫째가 돈이요. 둘째가 빽인데 이걸 부모는 못해주지 않느냐’라고 하셨죠. 그때 생각한 것이 구봉서 선생님이 우리 작은아버지였으면, 서영춘 선생님이 우리 삼촌이었으면 하는 거였죠. 이젠 원로선배님이 되었지만 그때는 늘 그 생각을 했어요. 그 동안 여한 없이 방송생활 했는데, 좋은 글들을 보면 '원하면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하는데 다 맞는 말인 것 같고, 또 어떤 책에 보면, '잘될 것이다. 잘 안 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 맞는다' 라고 정의를 한 글도 있던데 다 맞는 말들이다.




Q, 아들이 잘못 되어서 야단친 적이 있는지? 어떤 내용으로?

기억나는 것 중에 매를 든 것이 3번 정도 있어요.
한 명만 때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아들을 다 때리지요. 그 외는 야단을 많이 쳤던 기억이 있어요.
'아들아, 아빠가 잠시 잊고 있었단다'라는 번역서를 냈는데, 일본 책이고 그림책입니다. 책의 분량은 얼마 안 되지만 그 책을 보면 답이 나와요.
한번은 교회에 갔는데 경비아저씨하고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안 해가지고 하나님께는 ‘죄송합니다’ 하고 바로 집에 와서 매를 든 적이 있고, 또 한번은 미국에 있었을 때 친척들이 왔는데 애들이 난리를 쳐서, 친척들이 다 간 다음 자고 있는 애들을 깨워서 바로 매를 들었죠. 잘못 한 것은 하루 밤 지나면 잊어버리고 무효가 되잖아요.
세 번째 무지 화가 많이 났던 적이 있는데, 애들이 엄마를 너무 우습게 알고 대들었을 때예요. 엄마한테 너무 지나치게 대한 거죠. 그래서 매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Q.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아들에게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있는지? 부모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있는지?

천성적으로 갖고 나오는 것이 있어요.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안 되는 거더군요. 둘 다 똑 같이 A형인데, 큰 애는 야행성이에요. 저하고 똑 같아요. 새벽 2시에 물 먹으러 가면 만나는 것이 큰 애에요. 작은 애는 밤 10시만 되면 그냥 자는 애에요.
타고난 천성이 있기 때문에 부모가 그걸 잘 읽어서 편안하게, 좋은 방향으로 끌어줄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걸 언제 아느냐? 애가 태어날 때부터 알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도 키우면서, 다 키운 후에 라는 거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은 무지 하지만 타고난 천성에 따라 많이 다른 것 같더군요.

생각을 해보면, 내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준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다 까먹으면 그만인걸.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처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어야지. 절약하고, 열심히 벌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옳지, 재산을 얼마 물려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항상 게으르지 말라고 말하는데, 게으른 사람은 성실할 수 없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성공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강조 강조를 해요. 근데 그것도 스스로 알아들어야지, 안 그러면 만날 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해요.
그나마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로서 바르고, 옳게, 어떻게 살아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늘 한다는 거죠. 어린이재단에 홍보대사로 10년 넘게 있었고, 인연은 23년 정도 됩니다. 기부한다는 것과 좋은 일 한다는 것은, 특히 기부는 문화를 넘어서 습관이 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습관이 되어서 같이 가 줘야지 이담에 돈 벌어서 한다면 그땐 이미 늦잖아요. 가진 게 없더라도 조금씩이라도 같이 나누면서 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Q. 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 적은?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만 하려 해도 짠해집니다.(말을 끊고 잠시 숙연해졌다)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좋게 이야기하면 아버지 DNA 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 유전자로 일생을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너무 고마운 거구요, 틀림없는 거잖아요, 사실 그게 다 일수도 있구요. 그 외에는 너무 책임감이 없으셨다는 것. 저는 철공소집 아들로 태어났어요. 아버님은 산소 용접이라는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머니를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켰으니까요. 아버지하면 딱 떠오르는 것은 착하신 분, 한 없이 착하셔서 여기저기 많이 당하신 분이었죠.
이런 일화가 하나 있어요. 79년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80년도에 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79년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가 하루는 먹는 은행을 하나씩 까서 꿀에 담그시더라구요. 전 그걸 보고서 당신 건강은 끔직히도 챙기시는구나 생각했는데, 근데 그게 저를 위한 것이었어요. 제가 기관지가 좋지 않으니까 저를 위해서 그걸 했던 거예요. 나중에 그걸 알고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몸이 약한 저를 위해서 자라피를 구해다가 먹이셨는데, 자라피를 먹이면 추위를 안탄다고 여러 번 말씀 하셨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게 잠재의식 속에 남아서 겨울에 추워도 추운 티를 낼 수가 없어요. 추워도 참는 거지요. 아버지가 실망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는 얼굴이 아버지와 똑 같아요. 어떨 때 거울을 보면 진짜 아버지가 거울 안에 서 계셔서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지금은 모든 걸 다 잊었고 보고 싶죠. 같이 사셨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Q. 살아계신 동안 아버지와 포옹해 보신 적이 있나요.

옛날 아버지들 다 그렇습니다. 스킨쉽(포옹)이 없었죠.
저는 아이들에게 스킨쉽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해요. 아직도 아빠라고 부르는데, 전 그게 좋아요.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불러봐라. 저 어릴 때는 아빠라는 단어를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으니까요. 그냥 아버지,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버지 오신다, 그렇게 생활력 없고, 책임감이 없으셔도 어머니는 일단 아버지면 모두 나와서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하라고 했거든요. 용돈 한번 주면 그냥 좋아가지고, 거의 준 적은 없어요, 줄 것도 없었지만, 어쩌다 한번 용돈 한번 주면 정말로 감사합니다 했었죠. 당시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니까요.
기억으로 김장할 때 였던가 한번 안아(포옹) 주신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론 기억이 없어요.



Q. 아들하고 의사소통은 잘 되나요?

일부러라도 가서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죠.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에서도 샌다고, 안에서 대화를 잘해야 바깥에서도 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둘 다 말이 없어요. 말을 거의 안 해요 둘 끼리도 거의 안 해요. 저는 자꾸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야 말을 할 수 있다고 봐요. 대화는 습관에서 오는 거라 보기 때문에 자꾸 이야기를 해야 둘만 있을 때도 어색하지 않아요. 부부지간도 자주 대화를 하지 않으면 둘만 있어도 어색해요. 집사람과는 수다를 많이 떨기 때문에 싸우다가도 금방 이야기 하고 그런 편이거든요. 근데, 두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그런 이야기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오기 때문에 말 많은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그게 제일 아쉬워요. 언젠가는 느끼겠지 싶은데, 큰 아들이 군대에 가서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 받아 보고 난 후, 애비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지금은 말이 잘 통하는 며느리가 들어와야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웃음) 교육방송에서 하는 ‘노노클럽’이라는 프로에서 어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어른 말씀이 ‘아들이 셋인데 다 말이 없다. 그런데 큰 아들을 장가보내서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아 이게 어찌된 건지 이 며느리도 과묵해서 말이 없다. 환장하겠다.’ 이러셔요.  가장 큰 효도는 부모 앞에서 재롱을 떠는 거라고 생각해요



Q. 요즘 젊은 아빠들의 경향을 프랜디(친구같은 아빠)라고 한다. 두 아들과 어떻게 지내시는지?

초등학교 때 미국에서 있을 때인데, 거의 매일같이 학교 갔다 오면 아이들과 놀아주었어요. 농구하고, 자전거타고 말이죠. 그 다음 단계를 지나가다 보니, 철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둘째 한데 ‘야 넌 왜 이렇게 말이 없니! 돌아와라!’라고 했더니 ‘아빠! 형이 사춘기잖아, 그래서 말이 없는 거고, 이제 제가 사춘기 접어들었잖아, 그래서 말이 없는 거야, 끝’ 이러더군요.
내가 친구처럼 지내겠다고 해도 그게 맘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더군요. 근데, 어떤 집은 아들 둘이 다 컸는데도 말이 많아요, 그렇게 타고난 것을 어떡해요. 그냥 부럽죠.
제가 남자인데도 어렸을 적에는 밖에 나갔다 오면 어머니에게 많이 떠들었어요. 어머니가 오죽하면 ‘조금 있다가 해라’고 할 정도였거든요. 우리 집사람이 말이 별로 없어요. 와이프 탓을 하지 않지만 그런 영향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요. 누구 탓하기 전에 그렇게 갖고 타고 난 것을 어떡해요.



Q. 아버지가 이렇게 사셨더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지금 아쉬움은 그래도 살아계셨으면 하는 거죠. 60이 못되어서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어떤 것 까지 생각했냐면, 정말 천하의 불효 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왜 엄마가 먼저 돌아가셔야 되나,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후 엄마가 돌아가셔야지 왜 엄마가 먼저 돌아가셔야 돼, 평생 고생만 했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삯바느질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나 하는 생각 말이죠. 제가 중학교 때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자다가 깼는데, 어머니가 인두 가지고 졸고 계셨어요. 어머니 주무시지 그래요 그랬더니, 요것만 마저 하고, 그렇게 삯바느질 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게 우리 어머니예요. 제가 개그맨이 되고 어머니께 목돈도 챙겨드리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랬는데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니까,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셔야 맞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지금이라도 살아계셨다면, 아버지라도 살아계셨다면 정말 잘 해 드릴 수 있을 텐데 말이죠.


Q. 아버지로서 두 아들에게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준다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평소 자주 해요. ‘우리 이런 것 하나만 약속하자. 내가 너 보기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 될게, 너희들도 아빠보기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어라.’ 서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고 이야기를 해요.
큰 애가 대학생이 되고 난 후 소주 3번 했어요. 아~ 아들이 있으니까 이런 것이 좋구나 싶더군요. 중간에 ‘여유만만’을 하차 했을 때 일자리를 모두 잃은 것도 아니었지만 아들이 ‘아빠, 이제 내가 벌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던 적도 있어요. 좀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아들들에게 아빠의 장점이 뭐냐고 물었더니 ‘성실한 거’라고 해요.



인터뷰를 마치며, 아들들이 이야기했다는 ‘성실한 아빠’라는 평은 정말 옳은 평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마침 그 날이 성탄절이라 가게에 손님이 엄청 많이 붐볐는데 이홍렬 씨는 일일이 인사하랴, 사진 촬영에 응하랴, 사인 해주랴 정신없이 바쁜 모습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틈을 내서 인터뷰를 진행한 것인데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열심히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정말 바쁜 와중이라 이쯤에서 인터뷰를 마쳤다. ‘다음에 소주 한잔 같이 하자’는 인사가 빈말이 아닌 진심임을 느끼면서 아쉬운 자리를 마감하고 헤어졌다.


이번 인터뷰는 이번 12월 부터 김용전작가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아버지 " <아버지를 생각 한다> 인터뷰 시작하며"  주관으로 진행하는 행사이다.
두번째 진행으로 개그맨 이홍렬님과 함께 했으며, 계속해서 인터뷰는 진행 될 예정이다.
만약 인터뷰에 참여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지 환영한다

 

저작자 표시
Follow hongss on Twitter

blog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