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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거꾸로 거스른 인물중에 속하는 '정순왕후 김씨' 그는 왜 그토록 정조를 죽이고 싶었을까?

조선왕 독살사건 정조편에서 보면 정조를 암살한 인물로 '정순왕후 김씨'를 지목한다. 그 만큼 정조와 정순왕후는 원수지간이었고,정순왕후는 정조가 죽은 후 순조를 통해서 수렴청정까지 했으니 참 대단한 인물중에 하나다.
자식이 있었다면 더 대단하게 '가문의 영광' 을 더 찾고자 했는지 모른다.

역사에서 정순왕후 김씨에 대한 평가는 개혁과 개방을 외면하고 오히려 보수와 폐쇄로 전환한 세도정치는, 역사의 반동이나 후퇴였으며 사실상 조선의 멸망이라고 평한다.

당시 정조가 사망한 후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노론 강경파와 함께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키며, 명목은 사학인 천주교를 금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신서파인 남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정순왕후 김씨는 '정약용의 살인사건' 이라는 책에서도 존재한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아주 사실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는 책으로 실존의 그럴듯한 내용을 가지고 정약용의 당시 어려움을 가진 부분을 표현한다.
그곳에서 정약용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이다. 지금의 <이산>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조폭짱' 이미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순왕후 김씨는 누구인가?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책 자료에 의하면, 정순왕후는 김씨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은지 2년 뒤에 일이다.
15세 때인 1759년(영조35년) 66세의 노인이었던 영조의 비로 간택되었다.
당시 그녀는 영조의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고 손자인 정조와는 겨우 일곱 살 차이였다. 매우 가난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고,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속에 가두고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치죄를 당연시했던 벽파로 나누어지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때에 벽파인 공서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 대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정약전,정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사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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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김씨(출처:iMBC)

<이산 정조대왕> 책에 의하면 정순왕후을 이렇게 말한다.
"정순왕후, 사실 그녀 역시 치열한 권력투쟁의 희쟁자였다. 15세의 꽃다운 나이에 왕비가 된 그녀, 정조에 의해 친정이 풍비박산나자 그 원한으로 꾸려온 인생이 아니었던가. 그 안에 여인으로서의 행복이 과연 있었을까."
그전에 정조 또한 정순왕후로 인해 그 아비가 죽음을 당했으니 참 동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픔이다.
둘의 싸움은 정순왕후의 승으로 돌아갔으며 3년 반 동안 수렴청정하면서 정조가 이룩했던 개혁과 성과를 완전히 백지화 시켜버렸다. 그 또한 수렴청정을 마친 이듬해인 1805년(순조5년)에 파란만장했던 삶을 접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를 그토록 죽이려 했는가?(세손시절)
정순왕후에는 후손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지세력이 약하다 보니 자신들이 지지하는 왕족을 정순왕후의 양자로 삼아 등극시키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사도세자와 자식을 모두 제거해야 했다.

만약 제거가 되었다면 정순왕후의 자손으로 왕이 되며 그의 집안은 활짝 필수 있었을 것이다.

정순왕후 김씨는 왜 정조의 독살을 하고자 했는가?
대비 정순왕후 김씨와 정조는 법적으로 따지면 모자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였다. 또한 정조 24년인 이해, 세자(순조)의 나이 11살로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친정이 다시 살 것이다.
정조가 죽어야 정순왕후 집안이 살아날 수 있다.

정조가 죽기전 마지막 죽음을 본 사람은 정순왕후 김씨이다.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예법을 어기면서 정조의 임종을 맞이했으며 그 당시 정순왕후 김씨는 직접 탕약을 가지고 정조에게 가져갔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이에 심환지 등이 명을 받고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잠시 후 방 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조실록> 에 정조의 임종 장면과 시간은 상세히 기록하지 못하고, "이날 유시(오후 5~7시)에 상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 고 두루뭉술하게 기록한 것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였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로 정조의 죽음을 독살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정조의 갑작스런 사망은 개혁의 절정으로 치닫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은 후 2달 후에 승정원일기에는 정조 독살설이 기록이 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떠나기 한달 전 만해도 상당히 정국 구상을 밝혔기 때문에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정조와 같은 입장에 서 있던 남인들 사이에서는 독살설이라고 주장했다.

정조의 투병과정 기록
사망하기 보름 전부터 기록된 정조는 병은 해묵은 홧병과 그로 인한 종기였다.
6월 14일, 지방의원이 정유교에게 진찰 받는다
6월 16일, 궁중의 주치의 격인 내약원이 진찰을 청하자 이를 거부한다. 게다가 정조는 가감소요산이나 백호탕 등의 약을 직접 처방한다. 정조는 내약원을 불신을 했다. 자신의 제거하려는 정치세력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의원 최고 책임자는 좌의정 심환지이며 그는 정적관계에 있던 노론 강경파의 영수였다.
6월 24~26일, 연훈방 치료만 했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 의원을 시켜 왕을 죽인 정승이라고 적은 인물이 바로 심환지였고 그가 썼다는 독약이 연훈방이었다.
연훈방 치료를 받은 후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듯 했다.
그러나 사흘째 연훈방 치료를 받은 26일 저녁부터 의식이 혼비해져갔다.
6월 28일, 정조의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으며 끝내 숨지고 만다.
여기서 독살설을 제기하는 장시경과 정약용은 '연훈방'을 뜻하는 것은 '독약' 이라고 한다.  정조는 자신의 병을 홧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처방전도 홧병에 관한 것이다.


위 자료 참고는 조선시대 책에서 정순왕후 김씨에 대한 자료를 발췌해서 적은 내용이다. 때론 정순왕후 김씨는 가문의 위한 한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로 정조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산> 에 대해서 제공했던 자료들
아래 자료는 네이버 지식을 통해서 발췌한 자료이다. 선조시대부터 붕당정치에 대해서 잘 표현된 자료이다. (원본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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