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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공부를 통한 중용을 지키는 일 아닌가 싶다. 읽다 보면 생소한 내용들이 있고 그것을 통한 또 다른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아마 저자 장정일도 그렇게 하고자 이 책에서 소개하는 책들을 하나씩 읽어 가면서 공부를 하고 있나 보다.

처음에 나오는 이덕일님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박노자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은 그래도 읽어서 이해가 싶더니 가면서 부터 쉽지 않다. 갑자기 어려워 지다 보니 감각이 무뎌진다.

이 책은 책을 통한, 지식인을 통한 이 세계를 바라보는 지혜를 쌓아가고자 한 내용으로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다소 틀릴 수도 있으며 어떤 책을 접하냐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인지 여러 방면의 책을 읽어야만 올바른 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읽었던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 이라는 책이 생각 난다. 여러 지식인들이 나와서이 사회가 하는 많은 거짓말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진실로 알고 그렇게 가르키고 있다. 그런 내용을 여러분의 저자님들을 모시고 인터뷰한 내용을 적은 내용이다. 한번쯤 읽어 보시길 바란다.

독서 그 자체가 목적인 독서와 독서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독서를 구분했다.
에스카르피에 의하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즐거움인 책 읽기의 대표적인 예는 문학 작품이다. 그것과 반대되는 수단으로써의 독서란 실용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읽는 것으로, 어학을 배우기 위해서 읽는 어학서적이나 요리를 배우기 위해서 읽는 요리 책은 물론이고 자연과학이나 사획과학 도서가 당연히 여기에 포함된다.

"장정일의 공부" 책 발췌 (p48)

위 내용을 읽어보면 요즘 제가 있는 실용도서의 책들은 독서라고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전 이런 책이 더 좋은데 어쩌죠.

나치는 유태인을 미워했다. 그리고 그것과 똑같이 집시와 재즈를 미워했다. 나치가 집시를 미워한 까닭은 그들이 "대단히 불균형하고, 불투명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신뢰할 수없고, 게이르거나 이동적이고, 자극에 약"한 데다가, 간단히 말해 그들은 "노동을 기피하는 반사회적인 자" 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재즈는 왜 탄압받았을까? 나치의 문화 정책자들이 보기에 재즈는 "리듬에의 완만한 몰입,정해진 댄스 스템이 아닌 즉흥적인 몸동작, 질서 정연한 멜로디가 아닌 돌발적인 불협화음이 느슨하고 해이한 삶의 느낌을 표현" 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곧 그것을 즐겨듣는 청소년들에게 "청소년단의 군사 훈련,학교규율,공공 기간들의 경직된 요구, 나치 공직자들의 '날 선' 태도, 일상적으로 강용하는 의무"로 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심어 주는 것으로 간주 됐다.
21만 명이 넘는 집시가 수용소에서 말살되고, 재즈를 듣는 청소년들ㅣ 처벌을 당하거나 학교와 사회로부터 쫓겨나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만 했던 것은, 나치가 건설하고자 했던 국가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준다.

"장정일의 공부" 책 발췌 (p198~199p)

책을 통해서 알게 되는 힘은 무지 크다고 볼 수 있다. 장정일의 공부는 그런 내용에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3/1 정도가 남았다. 읽으면서 내가 점점 똑똑해 지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 한다.

얼마전 장정일의 공부를 머리말을 읽으면서 소개한 내용이 자꾸 생각이 난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라는 표현으로 쓴 내용인데 한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10의 중간은 5의 언저리일 것이지만 100의 중간은 50의 언저리며, 1000의 중간은 500의 언저리다. 이런 식으로 중용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사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위치에 서 있게 된다.

중 용이 미덕인 우리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 왔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받는 인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언제나 '중요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 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한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 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장정일의 공부' 책에서 발취 머리말 부분(4p~5p)